2014년 3월 18일 화요일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 안증회, 안상홍님, 새언약유월절, 안식일, 어머니하나님 - 이스라엘 독립의 원동력, 시오니즘(2)

이스라엘 독립의 원동력, 시오니즘(2)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스라엘 

  A.D. 70년, 6만 대군을 이끌로 온 로마 장군 티투스가 스코푸스 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은 '동방에서 가장 축복받은 도시'였다. 비록 긴 세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해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찬란한 역사와 윙용을 뽐내고 있었다.
  밖에서 보는 충경과 달리 예루살렘 내부는 생지옥과 다름없었다. 로마 군대에 포위되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3개의 유대인 군벌에 의해 분열된 채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각 군벌 지도자들은 자신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하겠다며 서로 경쟁했다. 로마 대군의 움직임에 군번 지도자들이 내분을 중단하고 2만 1천 명의 전사들을 집결해 대항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의 수원(水源)인 기혼 샘의 물길을 차단하고 식량 보급로를 완전히 끊었다. 예루살렘이 수대월간 봉쇄되자 성내 민중들은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허리띠, 장화, 방패에 달린 가죽을 떼어내 씹어대고, 짐승들조차 건드리지 않는 쓰레기를 뒤져 먹었다.
  전염병이 돌고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수습되지 못한 시신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이들이 목숨을 건 탈출을 시도했지만 대부분 로마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루살렘 성밖 감람산 위에서 매일 500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전해진다.
  몇 달간의 봉쇄 끝에 로마 군대가 성벽을 무너뜨리자 곧이어 대량 학살이 벌어졌다. 유대인들은 결사항전을 벌였지만 수개월 동안 굶주리다시피 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거리마다 남녀노소의 시신이 쌓였고 핏물이 강처럼 흘렀다. 마을들은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졌다. 유대인들의 정신적 지주인 성전은 오늘날 '통곡의 벽'으로 알려진 서쪽 벽만 남긴 채 철저히 불타고 파괴되었다.
  11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가운데 운 좋게 살아남은 자들도 비극을 피하지 못했다. 군사들은 끝내 죽임을 당했고 건장한 자들은 이집트 광산의 노역자로 보내졌다. 상당수는 말 한 마리 값도 안되는 돈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죽을 때까지 사자와 싸우도록 선택된 자들은 원형경기장이나 개선식에 전시되었다.
  예루살렘 함락 과정을 현장에서 생생히 지켜본 역사가 요세푸스는 증언했다. "예루살렘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웅장한 위용으로 모든 인류 가운데 우뚝 선 명성을 갖게 되었을 한 도시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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